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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부끄러우십니까?, 반성하고 있으십니까?>
 내 일생일대 가장 큰 과오는 중학교 때 커닝을 한 것이다. 국어에 비해 수학이 자신 없었던 나는 수학 성적이 우수한 친구와 거래를 했다. 중간고사 시험 때 나는 국어 시험 답안지를 보여주는 대신 그 친구의 수학시험 답안을 보여 달라고 했다. 1교시 국어 답안지를 그 친구에게 보여주는 것은 성공했지만, 2교시 때 나는 그의 수학시험을 훔쳐보다 우리학교에서 가장 악명이 높던 학생주임선생님께 멱살을 잡혔다. 나는 60여명 가량의 반 친구들 앞에서 양 볼을 번갈아 가며 10대의 따귀를 맞았다. 반 친구들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따귀를 맞으며 내가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커닝을 했다는 것 자체에 대한 반성에 앞서 나만 운 없게 걸려 뺨을 맞게 된 억울함과 부끄러움이 한 달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학시절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읽으며 나는 십 여 년 전의 나의 과오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베네딕트는 <국화의 칼>이라는 책에서 유일신을 믿는 서구인들이 신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문화라면 다신교를 가진 일본인들은 동료들 속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문화라고 지적했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언뜻 보면 비슷한 감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감정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 결과에 대처하는 방법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치부를 덮어 미화하려 하지만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치부를 드러내 반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커닝을 하고 선생님께 걸렸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바로 반 친구들 앞에서 따귀를 맞은 수치심이었다. 나를 응시하는 친구들의 반응을 의식하느라 그때 당시 나는 커닝을 했다는 잘못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지 않은 이들도 남들 앞에서 떳떳한 척을 할 수 있고, 남들 앞에서 떳떳하지 않아 보이는 이도 자기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다.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서 연일 터지고 있는 학력위조사건은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지 않아도 남의 눈만 속이면 "만사 OK!"라는 식의 한국식 수치심 문화의 발현이다. 학문계, 예술 문화계, 연예계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학위를 위조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반성하고 노력하기보다 남들의 눈만 가리고 보자는 식으로 학위를 위조하였다.

신정아, 김옥랑, 윤석화, 주영훈 등 요즘 각계에서 학력위조 커밍아웃이 봇물을 이루고 있지만 이들에게서 진지한 반성의 자세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속였다는 죄책감보다는 운 없게 들켜 체면이 깍였다는 수치심을 느끼며 진지한 반성을 하지 못하고 있다. 반성은커녕 주영훈 씨는 자신의 치부를 덮으려다 거짓말이 들통 나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윤석화, 김옥랑 등 예술 문화계의 지도자로 명성을 날리던 학력위조자들 역시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지려하기보다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 난 수치심에 외국에 숨어 여론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진중권 씨는 일본의 역사왜곡의 원인을 수치심과 죄책감의 혼돈에서 기인하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반성해야할 제국주의적 침략행위에 “그 때 조국을 위해 몸 바쳐 일본 제국화를 이룩해야 했다.”고 생각하며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깊은 반성 없이 남의 눈만 의식해 자신의 체면에 대한 부끄러움만을 느낀다면 그 사람의 과오는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다.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평화헌법을 체결했으나 아직도 과거의 만행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하지 못하는 일본이 용서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다. 학력위조로 우리 사회를 술렁이게 했던 학력위조자들이 진정한 용서를 바란다면 “부끄럽습니다.”보다 “반성합니다.”라는 말을 먼저 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중학교 시절 커닝 사건을 진심으로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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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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