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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2008.2.14)

내게 숭례문이란 무척 낯선 이름이다. 내가 아는 그 문의 이름은 서울 도심 한 복판에서 길을 잃고 시장과 더부살이 하는 남대문이었다. 한국홍보영상에 출연하는 하나의 상징과 이미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무지했다.

 

전대미문의 문화재 소실에서 누군가는 책임소재를 추궁하고, 그 가운데 방향이 채 정해지지 않은 복원론이 하나 둘 나오고 있다. 현장에서는 600년 역사와 전통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너무 큰 나머지 확성기로 곡 소리를 실어 나르고, 다른 한편에선 불탄 현장을 당분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냉소적인 자기비판도 둥지를 틀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자. 역사란, 전통문화란 그 누군가가 던진 불에 무기력하게 스러져가는 미약한 것일까? 숭례문의 홍예문 천장 용 그림을 보다가 불사조가 생각났다. 불사조는 하나의 생이 다하면 스스로 자신의 몸을 불태워 새롭게 태어난다고 한다. 되살아나는 불사조는 어제의 기억을 가지면서도 전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타의에 의해 불탄 숭례문을 불사조에 비유할 수는 없지만, 역사란 소중한 어제의 기억을 오늘날에 맞춰 재발견하는 작업들의 연속이 아닐까? 다행히도 소나무와 목조건축 이야기가 조금씩 되살아 나고 있다.

 

질문은 던져졌다. 숭례문 온 몸을 던진 큰 질문이. 굳이 모두가 그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질문에 하나의 답만 강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능하다면 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대답들을 통해 한양이 아닌 서울에서 함께 살아 숨쉬는 숭례문과 재회하고 싶은 욕심이다.

 

그리고 여력이 된다면 답에 이르는 길 위에서 불을 던져야만 했던 채씨와 또 다른 채씨의 울분에도 귀 기울여주는 정치인과 언론인을 만날 수 있었으면바란다.

 


*
중앙일보 노재현 기자님의 잿더미에서 건져낼 것들칼럼을 통해 숭례문 방화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좋은 글과 함께 글을 게재할 수 있게 허락해주신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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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7.02.15] [노재현시시각각] 잿더미에서 건져낼 것들

http://news.joins.com/article/aid/2008/02/14/3061549.html

 

‘몸을 일으켜, 멀리 계곡 사이의 금각 쪽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소리가 그곳에서 울려왔다. 폭죽 같은 소리이기도 하다. 무수한 인간의 관절이 일제히 울리는 듯한 소리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금각이 보이지 않는다. 소용돌이치는 연기와, 하늘로 치솟은 불길이 보일 뿐이다. 나무 사이로 수많은 불꽃이 날리어, 금각 위의 하늘은 금가루를 뿌린 듯하다’.

 

일본 전후 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미시마 유키오(1925~70)의 소설 『금각사』 끝부분이다. 21세의 행자승이 자기 절의 사리전(금각)에 불을 지르고 산으로 달아나 불구경을 하는 장면이다. 숭례문 방화 용의자 채종기(70)씨는 범행 후 경기도 일산 아들 집에 갔다가 다시 강화도 전처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도 TV 뉴스를 보았을 것이다. 어떤 심정이었을까. 화염에 휩싸인 숭례문을 보며 전 국민이 그야말로 ‘관절이 일제히 울리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을까.

 

공교롭게도 일본 교토의 금각사(金閣寺·긴카쿠지)와 숭례문의 나이는 딱 한 살 차이다. 금각사는 무로마치 시대의 3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1397년 별장으로 세웠다. 그의 사후 유언에 따라 사찰로 바뀌었다. 숭례문은 1398년 조선 태조 때 건립됐다. 1950년 7월 2 각사, 2008년 2월 10 숭례문이 각각 방화범에게 희생됐다. 양국 모두 경악했다.

 

전문가들은 용의자 채씨가 반사회적 인격장애일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기한다. 이런 경우 용의자의 가족도 애먼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오죽하면 채씨의 딸이 “차라리 우리 집을 태웠더라면”이라고 말했겠는가. 범행 직후 체포된 금각사 방화 용의자 하야시 쇼켄도 정신이상 여부가 쟁점이었다. 검찰 공소장은 하야시의 범행 동기를 ‘자기 혐오, 미에 대한 질투, 아름다운 금각과 함께 죽고 싶었던 점, 사회에 대한 반감, 방화에 대한 사회의 비판을 듣고 싶다는 호기심’이라고 나열했다. 바로 이 대목이 미시마 유키오의 창작열을 자극했고, 일본은 빼어난 장편소설 한 편을 더 갖게 되었다.

 

정신감정에서 정상으로 결론난 하야시는 징역 7년형에 처해졌다가 나중에 53개월로 감형됐다. 그는 금각사가 복원돼 낙성식(55 10)이 열린 지 5개월 만에 폐결핵으로 숨졌다. 안타까운 사람은 하야시의 모친이다. 범행 다음날 검찰에 불려가 아들의 성격과 성장 과정에 관해 진술한 뒤 귀향길 열차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나는 잿더미 숭례문에서 우리가 건질 게 많다고 생각한다. 원래의 숭례문은 이미 타버렸다. 우리에겐 아직 시간을 되돌리는 기술이 없다. 그렇다면 잿더미라도 흉물 취급하지 말고 건질 것은 건지고 얻을 것은 얻어내야 한다. 우선은 하드웨어 측면이다. 숭례문 복원 여부와 방식, 문화재 관리 시스템, 소방기술 혁신이 당연히 중요하다(부끄러운 얘기지만 58년 전 금각사 방화는 화재경보기 고장을 틈타 자행됐는데, 숭례문에는 경보기가 아예 없었다).

 

정작 강조하고 싶은 것은 소프트웨어, 즉 숭례문 화재 이후의 정신적 성과다. 역시 지식인·예술가가 나서야 한다. 이미 몇몇 작가의 시와 산문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기는 하다. 고은은 ‘왜란에도 호란에도/어제런듯 그 동란에도/끄떡없다가/이 무슨 허망의 잿더미냐’며 절규했고, 이근배는 ‘다시 한번 보여다오/그 넉넉한 가슴, 그 드높은 사랑, 그 우뚝한 기상을’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 정도에 그쳐선 안 된다.

 

금각사 화재는 『금각사』 외에 미즈카미 쓰토무의 소설 『5번가의 다무루(多霧樓)』를 낳았고 그제 타계한 이치카와 곤 감독의 영화 『불꽃』도 탄생시켰다. 1976년에는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을 토대로 독일 작가가 대본을 쓴 『오페라 금각사』가 베를린에서 초연됐다. 방화사건과 방화범 하야시 쇼켄을 추적한 책도 다수다. 근래 없던 엄청난 사건, 엄청난 충격을 우리 사회가 이제부터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상당 부분이 지식인들의 지적·정서적 감수성과 역량에 달려 있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 [jaik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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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래의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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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이 <1984>라는 소설에서 경고한 정보기술 발달의 어두운 세계를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으로 기치 있게 맞받아친다. 빅브라더들에 의해  텔레스크린으로 24시간 통제되는 사회를 그린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출간한 미래공상소설 <1984>. 1984년 새해 첫날 전 세계에 방영된 위성 네트워크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조지오웰의 디스토피아 공상소설에 대한 백남준 식의 반격이다. 오웰이 말했던 비극적인 미래상에 대해 백남준은 '너의 예언은 틀렸다. 안심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만끽해라'라는 의미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 프로젝트를 시도 했다고 한다.


백남준의 예언대로 조지오웰이 염려하던 빅브라더들에 의한 사회통제는 소설속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급격하게 발달한 정보산업은 빅브라더들의 권력유지 수단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만끽 할 수 있는 인간을 위한 기술로 대중화 된 듯 보여 진다. 하지만 백남준이 보지 못한 정보화 사회의 신흥권력층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small sisters'다. 스몰시스터는 수다스럽고 일상의 소소한 관심사에 참견을 가한다는 신조어로 빅브라더가 다듬어진 권력에 의해 주도되는 반면 스몰시스터는 다듬어지지 않은 권력에 의해 주도된다.


오지랖 넓어 보이는 수다스러운 여동생을 떠올리는 스몰시스터는 빅브라더에 비해 위협적이지도 않고 되려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귀여운 여동생을 사칭해 개인의 사생활을 파해치고 다니는 스몰시스터는 오늘날 빅브라더들 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의 수다를 위해 희생물로 바쳐져야 할 수다거리들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몰시스터들은 단순한 유희를 즐기기 위한 호기심을 국민의 알권리라고 사칭하며 개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있다. 공중도덕을 지키지 못한 여성의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한 개똥녀 사건과 노현정아나운서의 결혼 발표와 함께 그녀의 옛 애인의 사진이 미니홈피를 떠돌아다니는 사건 등은 스몰시스터의 호기심이 국민의 알권리로 둔갑한 예이다.


국민의 알권리와 단순한 유희를 위한 스몰시스터의 호기심은 구분되어야 한다. 인터넷을 끄는 순간 잊어버릴 만한 가십거리를 알기 위해 한 개인의 삶 자체가 망가지는 세상은 조지오웰이 경고 했던 소설 <1984>의 세계와 다를 것이 없는 또 다른 디스토피아다. 국민의 알권리와 개인의 사생활이 상충될 경우 사생활을 침해하면서 까지 알아야할 권리에 대한 가치평가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한다. 알권리에 대한 신중한 평가가 이루어진 후에도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쳐 개인의 사생활이 최대한 존중되는 범위에서 알려져야 할 것이다.


정보기술발달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찬은 정보기술발달로 인해 침해될 수 있는 개인의 사생활을 묵인할 수 있다. 2007년을 사는 우리는 조지오웰의 디스토피아와 백남준씨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유토피아를 함께 보며 기술발달로 인한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로 전락하지 않도록 항시 경계해야한다. 인터넷 세상에서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라고 외치기는 아직 너무 이르다.


                                                                                        2008.2 written by 따사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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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교역 통해서야!

인간은 누구나 교역본능을 갖고 있다네.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교환하려는 성향 말이야. 그러면 자연히 전문화가 이루어질 밖에 없지.

 

그게 바로 내가 도시자치제 반대했던 이유라네.

자유로운 교역이 제한되고, 결국 그것은 경쟁을 통한 발전의 기회를 지역의 생산업자들에게서 빼앗는 결과를 초래하지. 결국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고통을 치르는 쪽은 없는 사람들이야.

 

도로 시장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단 말일세!

 

자네는 외부적인 기준에 반응한 거야.

그건 이미 자네 속에서 내면화되었어. 바로 공정한 관객 반응이라고 있지.

 

사람들 대다수의 행복은 내면의 성장과 변화에서,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도덕적 상상력 통해 성취되는 타인과의 나은 관계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소유가 아닌 존재가 해답이다.

 

원거리통신 개선되면서 소비자는 갈수록 도덕적 상상력을 발휘할 있게 되었습니다.

 

(‘애덤스미스 구하기’, 조나단 B.와이트, 2003, 생각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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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는 교역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교역이란 연린 통로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도로, 철도, 항로가 모두 교역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모든 인간은 교역본능을 가지며 이것이 최대한 자유롭게 발현될 전문화가 이뤄지고, 스스로 경제주체가 있다. 반대로 말하면 교역 통로가 제약을 받으면 우리는 온전한 경제주체가 되기 어렵다.

 

도로, 철도, 주파수, 항로어느 하나 제약이 없었던 적이 없다. 그것이 국가든 체제든 누군가가 그것을 관리하고 규율해왔다. 이해한다. 배경과 목적은하지만 애덤 스미스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온전하지 못한 경제주체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조금 다르다. 세계는 여전히 통행권을 배포하며 교역과 교류를 제한하고 있지만, 다른 한켠에선 적절한 기술 적당한 규모 대한 논의도 전례 없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새로운 통로인 통해서.

 

바로 부분에서 애덤 스미스의 교역 도덕적 상상력 멋지게 맞아 떨어진다. ‘이라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이곳과 지구 반대편의 거리는 깜짝할 사이에 소멸된다. 클릭 한번으로. 덕분에 우리는 소유보다 접속, ‘물질보다 존재 좀더 기울일 있는 삶의 방식을 낳을 있게 됐다. 이런 웹에서 도덕적 상상력 새로운 관계, 새로운 거래를 만든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누구나 어느 누구에게 다가갈 있다는 가능성은 어떤 교역을 만들어내게 될까? 앞서 소개한 KIVA 웹을 통해 선진국과 3세계의 관계가 어떻게 짜여질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도덕적 상상력을 발휘하는가에 따라 정말이지 전에 없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있다. 그리고 그런 관계들이 하나 쌓이고 확산되어 가면어쩌면 세상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모든 경제적활동은 인간의 활동이기 때문에 반드시 도덕적이어야 한다.”

- 윌리엄 레트윈과학경제학의 기원

Posted by 고래의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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