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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11 흩뿌리는 시처럼, 질주하는 영화처럼 - 블리치(2004~)

겨울비, 심금, 빛의 제국, 피레네의 성... 르네 마그리트는 초현실적인 작품만큼이나 시적인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시적인 제목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하지 않고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마법에 빠져들게 한다"라고 말하며 시적인 제목을 작품의 주요 요소로 중시했다.

난 만화책 <블리치(Bleach, Tite Kubo, 2004~)>를 마그리트와 같은 이유로 좋아한다. <블리치>의 매 챕터 표지에서는 마그리트가 말한 시적 언어를 자주 만날 수 있다. 싸우는 장소, 목적, 상대에 따라 다채로운 언어들로 수놓고 있는 챕터 표지. 타이토 쿠보는 챕터 표지를 때로는 흩뿌리는 시처럼, 때로는 질주하는 영화처럼 온갖 공력을 기울인다.  
 
1.
이치고와 친구들이 학교를 다니는 블리치 챕터 표지들은 살랑거리듯 가볍고 경쾌하다. 모든 싸움은 고만고만한 방학 숙제나, 모두가 기다리는 수업종료 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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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루키아를 잃은 뒤 거듭된 훈련 속에 검의 자아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내면의 깊이만큼 챕터 표지도 점차 본연의 색과 과감한 구도를 활용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세계에 적합한 언어와 구도, 저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빛, 불확실한 한 걸음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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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 많은 싸움, 수 많은 입장... 이야기는 점점 깊어지고, 얽혀있는 감정들의 실타래가 갈래갈래 복잡해질수록, 신기하게도 표현은 더 단순해진다. 때로는 기쁨을, 때로는 슬픔을, 그 사이마다 분노와 공포까지 거리낌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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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근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블리치는 챕터 -108 ~ -97을 통해 주변부 캐릭터를 단숨에 이야기의 중심부로 가져온다. 'Turn Back The Pendulum'이란 시적 제목 외에 챕터 숫자 앞에 '-'를 붙여 챕터 자체를 이전 챕터와 동등한 별도의 위치를 부여한 점은 정말이지 탁월하다. 이 챕터를 통해 <블리치>는 몇 개의 별을 위한 이야기에서, 수십개 각자의 빛을 노래하는 별들의 이야기로 탈바꿈된다.

Chapter -108. Turn Back The Pendulum (역시 One Manga)
http://www.onemanga.com/Bleach/31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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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챕터 표지는 소설, 시, 영화 등과 만화를 차별화시켜주는 중요한 형식적 요소다. 챕터 표지는 길고 긴 한편의 이야기를 수 백개의 짧은 호흡으로 나눠준다. 각 호흡은 전체 이야기 하위로 기능하는 동시에 각각의 선명한 색과 향을 간직한다. 이는 아마도 일/주간으로 소개되는 만화 출간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그 오랜 전통 덕분에 만화는 특정 소재에 대해 입체적이고 속도감있게 다양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타이토 쿠보의 챕터 표지는 수많은 만화 중에서도 특별하다할 수 있다. 영화 브로셔처럼, 책갈피 속의 시처럼, <블리치> 챕터 표지들도 기억되고 회자될 가치가 있다.

Posted by 고래의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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