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영감, 약속, 만남, 여행... 고래의뇌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97)
시나몬 주머니 (108)
가로질러 사유하기 (88)
Total
Today
Yesterday

'나는가수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3.20 [감사편지] 가수 김건모 & <나는가수다> 제작진에게

안녕하세요,

오늘 <나는가수다> 3회는 여러모로 제게 충격적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응원했던 김범수씨와 정엽씨가 1위가 되지 못한게 작은 충격이었다면, 김건모씨의 재도전 선택은 마치 도미노처럼 제 안의 무언가가 타닥탁탁 넘어지는 제대로 된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김건모씨라면...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동안 계속 생각해봤습니다. 답은 뻔해 보였습니다. 후배들과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쿨하게 퇴장. 가수로서의 자존심과 후배 격려 차원에서 마지막 노래 한곡 정도는 들려줄 수도 있겠지. 이 정도가 제가 생각해낼 수 있는 그럴싸한 답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김건모씨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처음엔 이게 뭐야.. 싶었습니다. 쿨해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방송이 끝나고 나서도 묘하게 그 선택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습니다. 신입사원도 뉴스도 눈에 잘 안들어오고, 발레리노도 거르고, 심지어 지금 기세로는 욕망의 불꽃도 건너 뛸 것 같습니다. 그냥 계속 김건모씨의 선택이 목에 걸렸습니다.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네요.

그러다 세찬 물살에 설겆이를 마친 뒤에야 작은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김건모씨는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를 뛰어 넘었다는 것을요. 그 선택은 구차해 보이기도 하고, 시간이 갈수록 부담만 쌓이는 무리수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김건모씨의 선택은 이미 그런 것들을 모두 뛰어 넘은 그 무언가를 향해 있지 않나 싶더군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단순히 '탈락 vs. 재도전' 양자선택의 구도를 뛰어넘은 '새로운 선택'이라는 거죠.

무엇이 김건모씨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게 했는가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역시 <나는가수다>의 7인의 역량과 제작진의 철학에서 비롯되지 않은가 싶습니다. 단순히 아마추어 중에 1등을 뽑는 서바이벌 게임이라면 부족한 능력에 발이 걸려 풋풋한 열정과 패기 속에 쿨가이로 떠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 부문의 No.1이나 다름없는 쟁쟁한 실력자들이 모인 서바이벌 게임이라면? 저는 아직 그런 능력도 배짱도 없지만 어쩌면 한번 더 걸어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일전에 <플라이 하이 Fly High>라는 만화에서 정상을 목표로 하는 체조선수들은 어떤 시야를 공유한다는 대목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뭐 만화는 만화겠지만서도. <나는가수도> 7인은 더이상 뽑아낼 수 없는 어떤 막다른 골목에서도 누군가의 도약으로 찌릿찌릿한 무언가를 나누고 그러는 동안에 어떤 시야를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김건모씨는 아마도 그 시야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전 이 프로그램이 좋습니다. 김건모씨의 어려운 선택에서 전 20대 중반 치열한 고민을 하며 무언가를 선택하고 기다리고 다시 주먹을 쥐던 시절을 되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경지겠지요. 김건모씨의 경지는 적어도 20년은 하나의 업에서 어떤 경지를 이루어낸 사람이 모든 것을 버려가면서까지도 자신의 업에 다시 정면으로 도전하는 경우에 해당될테니까요. 운이 좋다면 전 40대 후반이나 느낄 자격이 주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이 길었습니다만 어떻게든 꼭 김건모씨와 <나는가수다> 제작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오늘은 김건모씨가 '가수 김건모'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가수분들도, 김영희 PD를 비롯한 제작진도, 그리고 저를 비롯한 직업인들도 자신의 업을 다시한번 정면으로 마주보는 시간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고래의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