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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02 용서는 바라지도 마라. 2

"Deep throat".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어와 함께 워터게이트 사건의 내부고발자를 떠올리겠지만 30여 년 전 만해도 이 단어는 금기어였다. “목구멍 깊숙이”라는 영화는 포르노라는 장르를 세계적으로 대중화시킨 역사적인 영화다. 척 트레이너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린다 러블레이스를 키운 매니저이자 남편이다. 그는 평범한 이웃집 소녀와 같던 린다에게 포르노 연기를 지도해주고 감독들을 찾아다니며 린다를 포르노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스타가 된 린다는 척 트레이너에게 이혼을 요구하였고, 척은 스타가 되었다고 자신을 버린 린다를 용서할 수 없다고 비난하였다. 당시 미국의 언론들은 척 트레이너 편에 서서 린다를 비난하였다. 린다의 자서전 <수난>이라는 책이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수난>은 린다가 척 트레이너와 살며 그에게 학대받았던 삶을 고스란히 담은 책이다. 그녀는 남편 척에게 맞고 살았고 척은 그녀를 억지로 포르노 영화에 출연하도록 하였다. 이를 린다가 거부하자 척은 그녀를 감금했고, 그녀가 도주할 때마다 그녀가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폭력을 행사하였다. “목구멍 깊숙이”에서 그녀의 허벅다리 사이에 선명하게 찍힌 멍 자국은 이를 잘 방증 해주지만 당시 미국사람들은 그녀의 멍 자국보다는 이 영화의 가학적 성행위에만 관심을 갖으며 포르토 스타가 되자 남편을 버린 그녀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용서는 동등한 권력관계에서만 이성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용서의 사전적 의미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친 관계에서 약한 자의 죄의 경중을 판단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강자에게 있다. 이 과정에서 강자는 약자의 잘못을 자신의 입장에서 정의하고 자신을 위해 용서라는 기제를 사용한다. 남을 위해하는 용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용서는 오히려 용서받는 자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다. 척 트레이너가 린다를 용서하고 그녀를 받아들인다면 린다의 수난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몇 해 전 미국의 한 시사지는 소말리아 내전에 자원한 여성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녀는 전쟁상태가 훨씬 살만하다고 말한다. 군인으로 음식을 배급받고 남편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여성에게는 전쟁이라는 죽음의 공포보다는 남편이라는 일상의 공포가 더욱 위협적인 괴물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씨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지난 5년 간 미국에서 아내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의 수는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미국인의 수와 비슷하며, 아내구타는 강간, 자동차, 강도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여성 상해의 이유라고 한다. 또 지난해 유엔에서 발간된 '여성폭력 종식-담론에서 행동으로'라는 UN보고서에 따르면 (지난달부터 여성부가 이 보고서를 번역·발간 배포중이다) 이집트 여성의 97%가 여성할례를 당하고, 서안 및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여성 중 69%가 배우자 폭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성별 권력차로 인한 만성화된 가정폭력은 용서를 해야 하는 주체와 마땅히 받아야할 주체를 전도시킨다. 울며불며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를 외치는 쪽이 때리는 아버지가 아니라 맞는 어머니인 쪽이 대다수인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용서라면 구하지도 바라지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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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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