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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02 잠자리의 지도 - 이정록 <의자> 1

영원할 것만 같았던 세상에 대한 두근거림이 잦아들면 난 가장 먼저 시집을 찾는다.

시집에는 세상에 대한 찬란함이 가득하다. 더러는 쓰디쓰고 냉소적인 시들도 있다. 그것도 그것대로 좋다. 하지만 역시 생의 Secret Recipe를 들춰보듯 예상못한 생의 단면을 만나나게 하는 시가 내겐 제격이다.  

하지만 가끔 시로도 태업에 들어간 마음을 달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땐 길을 걸어야만 한다. 한번도 걸어본 적 없는 길을.


    잠자리가 물의 거죽을 집었다 놓았다 하는 것을 사람들은 목욕하는 거라 말한다. 하지만 그 누가 짐작하겠는가. 물속에서 학배기로 살던 그가 제 옛집의 닫힌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불어난 물살을 차며 건너오는 사람들도, 날개만을 꿈꾸던 애벌레의 간절함을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잠자리들이 돌아가야 할 자신의 옛길을 양 날개에 쑤셔 넣고 날아다니듯, 사람의 핏줄 또한 오래된 약도가 아닐까. 이제 야영은 죽어도 하지 않을 거야.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외줄에 매달려 다짐하고 다짐하듯, 날개가 지느러미였으면 좋겠어. 잠자리는 눈물 보석 같은 머리통을 자꾸만 갸우뚱거리는 게 아닐까. 잠자리의 눈 속에는 천 리 물길에 대한 정밀 지도가 들어 있다. 하지만 제 눈으로 제 눈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것, 동서남북도 없는 날개의 약도만 보고 또 본다. 갸우뚱거리는 것만이 생의 전부가 돼버렸다고 저물도록 발길질을 해댄다. 온몸에 술을 채워야만 지느러미를 꺼내는 사람들, 어둔 골목길을 흐느적흐느적 헤엄쳐 와서는 잔혹 물의 문에 헛발질을 한다. 밤새도록 쌍심지를 돋워 놓았는가. 아침까지 두 눈이 벌겋게 켜져 있다.

* 학배기: 잠자리의 애벌레
                                            '잠자리의 지도', <의자>, 이정록, 2006, 문학과지성사


언젠가 한번쯤 이 시를 그려보고 싶다...

Posted by 고래의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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