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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3.09 그래, 신념만으론 살 수 없어... - 타인의 삶(2006)
"난 당신의 관객이요." (HGW XX/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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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관객이 될 수 있다. 당신의 무대, 당신의 작품이 훌륭했노라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수 있다. 그곳이 자유주의사회라면...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그것도 사상통제 최일선에서 일하는 감시기술자가 위와 같은 말을 던졌다면? 마치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불쾌함, 이는 필시 조롱과 야유로 들릴 것이다.

여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심을 전하고 지켜낸 한 감시기술자가 있다. 영화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 2006)>는 하우프만이라는 감시기술자가 우연히 수많은 타인들 중 한 예술가부부의 삶을 감시하게 되면서 타인의 신념을 지지하는 '공정한 관객'으로 변화해 가는 진심어린 이야기다.

그런데 신념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누구나 주위 환경에 익숙해진다. 아무리 현실이 고단하고 불합리해도 저들도 우리네와 다름없다며 그렇게 체념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타협해서는 안되는 원칙들이 있는 법이다. 작가 드라이든은 예르스카의 자살에서, 감시자 하우프만은 브레히트의 시에서 신념의 한 열쇠고리를 발견한다.

초가을 9월의 하루하루는 파랗다.
그들이 품고 키우는 사랑처럼
곧추선 어린 나무들은 하늘을 향한다.
우리들 위엔 청명한 하늘이 떠있고
그 사이를 하얀 솜 같은 구름이 걸어다닌다.
당신의 가슴 속에 믿음이 있다면
이것은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Bertolt Brecht 作


두 남자는 신념을 믿었지만, 한 여자는 신념만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크리스타에겐 살아간다는 오늘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비록 제약많고 부조리한 일말의 자유일지라도, 그것이 이 힘겨운 삶을 지탱케 하는 자유라면 지킬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신념없는 자유란 갈 곳을 잃은 기러기와도 같다.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그녀이지만 그녀의 신념과 자유에 대한 고민은 우리 모두가 품는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 그래, 이럴 필요는 없어 모든 게 헛수고일 뿐이지
  하지만 당시은 어떡하고? 자유를 포기할 거야?
  당신 마음껏 글만 쓰면서 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지?
  당신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사람은 신념만으로 살 수는 없어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도 예르스카처럼 되고 싶어?
  난 싫어. 그러니까 가야 돼. "
                                                                                        크리스타-마리아 曰


이타카에 이르는 길고 험하다. 우리 앞으로 수많은 선택지와, 때때로 저항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질 것이다. 마치 약속이라도 하듯이 어느날 갑자기, 동시에.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강철같은 신념일까? 부조리한 현실 속의 지혜로운 타협일까?

<타인의 삶> 속의 예술가들은 마치 유일한 희망이라도 되듯,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자살을 선택했지만 자살은 답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생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인생을 소중히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뜻모를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 꼭 강철같은 신념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감시기술자 하우프만도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살아가지 않았듯이.


* '자살'하면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김영하, 1996, 문학동네)가 생각난다. 김영하는 소설을 통해 인생도 압축할 수 있는 것이며, 압축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법을 들려준다. 정말이지 인생이란 하기 나름이다.

"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압축할 줄 모른는 자들은 뻔뻔하다. 자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없이 연장해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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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래의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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