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영감, 약속, 만남, 여행... 고래의뇌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97)
시나몬 주머니 (108)
가로질러 사유하기 (88)
Total
Today
Yesterday
 

<우리를 위한 존재, 우리에 대한 존재?>-몸



 

<루벤스 작- 레우키푸스 딸들의 강간>



 남성화가들이 그린 누드화를 보면 여성의 몸에 대한 판타지적 요소가 잘 드러나 있다. 이들의 눈에 비친 여성의 가슴과 엉덩이는 비현실적으로 풍만하며 허리와 다리는 가슴과 엉덩이에 맞지 않게 가늘다. 루벤스의 작품에는 이러한 비현실적 몸매를 소유한 여성들이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루벤스의 ‘레우키푸스 딸들의 강간’이라는 작품에는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들의 판타지가 절정을 이룬다. 이 작품은 남성들이 여성을 윤간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루벤스는 강간을 당하는 여인들 옆에 사랑의 신인 에로스를 그려놓았다. 집단 강간을 당하고 있는 여성의 몸에서 육감미를 극대화하고 강간당하는 여성이 사랑을 느낄 것이라는 루벤스의 그림에서 여성의 몸은 주체성을 상실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에 따르면 예술 작품은 “우리를 위한 존재, 우리에 대한 존재” 라고 한다. 즉 감상하는 우리가 없으면 예술작품은 그냥 물질 덩어리일 뿐이다. 하르트만의 말에 전적으로 반박할 생각은 없지만 문제는 그가 말하는 “우리”의 개념이 종종 사회적 기득권층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특히 몸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는 “우리”라는 존재에 주체적으로 참여해 기준을 마련하는 계층은 소수인 경우가 많다. 과거 누드화를 그리고 그것을 감상하는 ‘우리’라는 주체가 주로 남성들이었던것 처럼 말이다.


요즘은 몸을 감상하는 우리라는 주체의 울타리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다. 가수비, 권상우, 차승원 등 남자 몸짱 연예인이 인기를 얻고, 포르노그라피의 카메라 앵글도 여성의 시선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포르나까지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몸의 가치를 판단하는 우리의 울타리에 들기는커녕 가치 판단의 대상에 조차 들지 못하는 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장애인의 몸이다. 섹시하다, 뚱뚱하다, 크다, 작다 이전에 가장먼저 떠오르는 장애인의 몸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그냥 손상된 몸이다. 누군가 이 손상된 몸에 가치 판단을 할라치면 장애인 인권을 운운하며 판단불가 판정을 내린다. 장애인 섹스 컬럼리스트 박지주 씨가 몇 해 전 휠체어 탄 여성의 누드사진 전을 열었다가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산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을 내리는 우리의 내면에는 장애인의 몸을 우리와 다른 종족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몸을 판단할 기준 자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보아야 할 듯하다. 팔이 없는 장애인, 다리가 없는 장애인이기 전에 그들의 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서 다른 육체적 매력이 포장될 수 있는 장애인의 몸에 대한 열린 관점이 필요하다. 영국의 구족화가 엘리슨 레퍼는 해표지증으로 팔과 다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몸에 대하여 열린 관점을 가진 영국인들은 레퍼의 몸은 손상된 몸이기 전에 비너스와 같은 아름다운 몸으로 바라보아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앨리슨 레퍼의 몸을 비너스와 같은 조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니콜라이가 말했듯 사회적으로 아름다운 몸들이 장애인에게도 “우리를 위한 존재, 우리에 대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앨리슨 레퍼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다면...


 

http://www.alisonlapper.com/

                                                                              written by 따사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
 

서른여덟의 인혜

 인생의 안식년을 갖는 중이며,

 매일 두 시간씩 걷고 있으며,

 매주 한번 씩 등산을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전화 상담원으로 일하고,

 한 달에 한번 오 여사 모임을 갖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천천히 살면서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다.


김형경씨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의 주인공 서른여덟의 인혜에 관한 프로필이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사는 법을 새로 배워야한다. 동시에 죽는 법도 배워야 한다.”고 말한 스콧 펙의 말처럼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 죽기위해 새로 배워야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용기를 충전하기위해 우리는 반드시 삶의 안식년이 필요하다.


내가 인혜 나이쯤 되었을 때, 과연 삶의 안식년을 가져야겠다는 과감한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아니 지금 당장이 내 삶의 안식년을 가질 때가 아닐까. 난 아직도 배움이 부족한가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알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한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도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 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이타카’,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1863~1933, 그리스)

 

 

어느 날부터인가 인생은 아주 길고 긴 여행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삶이라는 게 좀더 가볍고 즐거워졌다.

 

여행자 사고방식은 아주 편리한 구석이 있다. 물론 여행자에게도 다양한 유형이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두 번 다시형에 해당한다. ‘두 번 다시유형도 다시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나 같은 경우는 이 시간, 이 장소는 두 번 다시 없다. 최선을 다한다!’는 에너자릭한 성실형 타입보다는, ‘아니어도 좋다. 돌아갈 필요는 없다. 이 길 끝에 다른 길이 있다!’는 사통팔달 만사태평형에 속한다.

 

긍정적이라면 긍정적일 수도 있고, 무책임하다면 무책임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여행 중에 많은 실수도 했고, 부족한 부분들을 채울 수 있는 농도 짙은 시간들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 깨달음 속에서 조금씩 더 성장하고 지혜로워 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내 안에도 이타카는 있다. 내 이타카는 나를 닮아서인지 하나의 모습보다는 여러 개의 모습으로 다가왔고, 때론 예고 없이 저 스스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어찌되었던 이타카에 귀기울인 시간들이 쌓여가며 조금씩 그 녀석의 형상도 의미도 뚜렷해지고 있다.

 

분명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타카로 향하는 여정은문득 나를 성장시키고 풍요롭게 해준 지난 길들에 대한 감사편지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고래의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