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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도록 질문이 그리운 이유


 고등학교 1학년 첫 모의고사 때 나는 모든 영역의 문제를 반도 채 풀지 못했다. 하나의 질문에 주어진 다섯 개의 답과 내가 생각한 답사이의 타협점을 찾지 못해서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보다 답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나의 공부법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해설집에 적혀있던 친절한 해설을 보면서도 나의 "왜"라는 의문은 설득 당하지 못했다. 마치 고교시절 탈출구가 명문대 입학이어야만 하는 명쾌한 답에 반항하는 사춘기 소녀처럼,


 고교 3년 동안 수능형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질문보다 답을 찾는 노력을 해야만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의 답 하나하나가 점수화되는 사회에 적응하며 세상을 향해 던졌던 의문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나에게 한 정치학 수업의 시험지는 잃어버렸던 나의 질문법에 향수를 불러 일으켜 주었다. 교수님은 시험지를 주시며 한 학기 동안 이 수업에서 배웠던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질문을 쓰리고 하셨다. 답이 아닌 문제를 요구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험을 치루며 근 몇 년간 내 삶을 향해 던졌던 나의 질문점수를 평가해 보았다.


언젠가 질문을 사랑하는 한 선배로 부터 '소크라테스 카페'라는 책을 추천받았다.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 준 이 책을 통해 그는 힘든 백수생활을 견뎠고 자신의 꿈을 찾았다고 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나에게 세상을 향해 던지는 질문들은 여고생의 반항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수능형인간이 되기 위해 잃어버렸던 질문법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미치도록 질문이 그리운 요즘 그 이유의 답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꿈을 향해 험난한 백조의 생활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엘리트 코스라는 SKY 인생에 끼겠다고 발버둥 쳤던 때보다 행복한 것 같다. 그것에 대한 이유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찬찬히 생각해 보아야겠다.

 

                                                      2008.1 written by 따사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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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시투아앵 오블리주로>


고종석 씨는 <코드 훔치기>라는 책에서 한국어의 시민은 두 가지의 의미를 뭉뚱그리고 있다고 했다. 그 첫 번째는 시민계급으로서의 시민이고, 둘째는 시민의식 자체의 시민이다. 앞의 시민은 부르주아의 영역이고 뒤의 시민은 프랑스어 시투아앵(Citoyeon)에 가깝다. 부르주아로서의 시민이 경제적, 계급적의미를 함축한다면 시투아앵으로서의 시민은 정치적 정신적 의미를 함축한다. 그리고 두 시민의 영역은 노블이라는 귀족 계층에 대항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왔고, 귀족계층의 붕괴로 현재 시민의 권력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시민의 전성시대인 오늘날 고귀한 신분의 사회적의무를 의미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이제 ‘부르주아제 오블리주’나 ‘시투아앵 오블리주’로 용어를 바꾸어야할 듯 싶다. ‘노블’이 의미하는 귀족계층이 붕괴하고 그 자리에 시민이 들어앉은 지가 반세기 가량 지난 오늘날 실재하지도 않는 노블레스 라는 개념은 책임의 주체를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과거 특정계층에 한정적으로 부과되었던 사회적 책임은 이제 모든 시민의 책무로 책정되어야 한다. 경제적 정치적 의미의 시민인 부르주아에게도, 정치적 정신적 의미인 시투아앵에게도 오블리주라는 사회적 책임은 골고루 전가 될 때가 온 것 이다. 프랑스나 영국과 달리 애초부터 노블이라는 봉건적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던 미국에서 사회적 책임의식은 모든 시민에게 골고루 전가되고 있다. 전체 미국인들의 98%가 어떤 형태로든 기부에 참여하고 전체 기부금의 77%가 소액기부자로부터 나온다. 록펠러, 빌게이츠, 워렌버핏 등 미국사회의 내로라하는 부자들 역시 사회 환원을 당연한 의무로 여기며 막대한 재산을 선뜻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오블리주는 어떠한가?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할 계층을 존재하지도 않는 노블에 한정하며 부르주아층도 시투아앵 층도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 급급하다. 이러한 사회의식 속에서 우리사회에서 기부문화는 퇴색된 지 오래다. 현대판 부르주아층에 해당하는 기업인들은 기부금을 비리를 막기 위한 면제부로서 약용하는 사례가 번번하다. EH한 일반시민들에게서 이루어져야할 풀뿌리 기부금액은 OECD국가 중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사회환원 문화가 시민 의식 속에 잘 녹아 있는 사회의 가계부에는 우리사회에서 볼 수 없는 항목이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기부금란 이다. 자신의 소득과 관계없이 모든 시민이 자신의 규모에 맞게 일상적으로 사회기부를 하고 있다는 증거다. “나눌 수 없는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듯 모든 사람은 의지만 있다면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요즘 태안을 찾는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시투아앵 오블리주가 조금씩 우리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시투아앵 오블리주’문화를 뿌리내려야 할 때이다.


                                                     2008.01 written by 따사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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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무슨 일을 하든 부자가 되는 것이 모든 것의 전제조건이라고 여겨졌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인터넷 덕분에 돈이 없어도 그런대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p.62, HIRANO)

 

블로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무언가를 전한다는 것 이상으로 한 가지가 더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블로그를 쓰는 과정을 통하여, 지식의 창출효과 이상으로 저 자신이 인간으로서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p.40, UMEDA)

 

(웹 인간론, UMEDA Mochio, HIRANO Keiichiro, 2007, 넥서스BIZ)

 


 

블로그(Parallels)를 시작한지 오늘로 딱 2주가 되었다. 처음엔 사회이슈를 추적하는 장으로 구상했었는데, 다음엔 세상에 대한 이런저런 딴지걸기, 그리고 결국엔 지난 10년간의 글과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공간으로 꾸려가고 있다.

 

난 웹이라는 공간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필요에 의해 찾고 머물고 떠날 뿐. 늘 그렇게 무언가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매일 뿐이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하지만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믿기 어렵겠지만, 우메다의 말처럼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10년 전의 자신, 3년 전의 자신과 대화하고, 그 시절 읽고 듣고 느꼈던 감정들을 오늘날에 비추어 재해석하면, 내일의 나는 그 시절들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덧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살며시 위로해준다.

 

열린 공간이 가져다 주는 가능성의 힘은 대단하다. 구글의 스타워즈 세계관과 오픈소스 철학을 끝끝내 명쾌하게 소화하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블로그와 지금의 웹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웹은 하나의 거대한 다리다. 위아래가 없고, 있는 자와 없는 자도 없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꿈꿀 수 있고 실험해볼 수 있다. 그 거대한 다리에 우리는 블로그라는 우리만의 열린 주소를 갖게 되었다. 웹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 그 끝이 어디인지 우주의 깊이만큼이나 가늠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건 예전과 달리 미친 듯이 뛰더라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 누가 받을지 모르는 편지를 계속 부치고 있지만, 언젠가 그 편지를 받은 사람이 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즐거운 기대그 길 위에서 히라노의 말처럼 우리는 저마다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UMEDA Mochio Blog (하테나 CEO)

http://d.hatena.ne.jp/umedamochio

 

HIRANO Keiichiro Blog (소설 일식저자)

http://d.hatena.ne.jp/keiichirohirano

Posted by 고래의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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