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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사에 있어 바로크시대는 多音-다성음악(polyphony)의 시대였다. 다성음악은 일반적인 화성음악과 달리 하나의 주된 멜로디가 진행되고, 그 밑에 반주가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개의 멜로디가 제 음가를 가지며 진행된다. 다성음악의 개척자인 바하는 대위법이라는 기술을 이용해 각각의 멜로디가 독립적 의의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화성을 이루도록 했다. 대위법에서는 각 성부가 명료하게 식별할 수 있는 선율적 독립성을 지니며, 또한 여러 성부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되고,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바하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우리는 악기들의 多音을 명료하게 감상할 수 있으면서도 그 개별의 음원이 화음을 이루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음악사에 있어 바로크시대가 多音의 시대였다면, 디지털 사에 있어 오늘은 바로 多音의 시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노암촘스키는 미래의 미디어로 ‘독립적이고, 비영리적인 누구나 참여해 多音을 연주할 수 있는 미디어’를 제시 했고, Daum 사의 이재웅 사장은 이를 착안해 다음커뮤니케이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촘스키의 多音정신은 요즘 다음사를 비롯한 포털사이트가 새로운 전략으로 내세우고있는 UCC의 등장으로 현실화 되었다.

UCC는 바로크시대의 다성음악과 같이 하나의 음가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모두다 개별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어떤 종류의 음원이나 메인 음이 될 수 있다. 자신의 끼와 재능을 알리는 동영상에서부터 전문지식을 활용해 영상을 제작하는 PCC(proteur created contents),여중생 폭행 동영상등의 고발영상까지 모두 UCC라는 오선지 안에서 자유롭게 음표를 그릴 수 있다. 하지만 UCC가 아무리 자유로운 오선지라고 해도 그 안에 규칙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일정한 룰 없이 그려진 음표는 결코 화음을 이룰 수 없어 소음으로 전락하게 된다.

다성음악이 개별음가를 살리면서도 화음을 이룰 수 있었던 대위법이라는 룰에 의해 화음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UCC의 세계 속에서도 대위법과 같은 최소한의 규칙이 필요하다. 우선 UCC를 제작하는 네티즌부터 기본적인 미디어교육을 받아야한다. 캐나다와 같은 미디어 선진국은 어렸을 때부터 인터넷 사용 윤리에 대해 철저한 교육을 받고 정규 수업시간에 직접 동영상물을 만들어 본다. 이 과정에서 공적으로 유포될 동영상이 어떠한 사회적 파장을 미칠 수 있는지를 토론하며 기본적인 인터넷 사용 규칙을 배운다. 우리나라도 무분별하게 UCC를 제작하기 전에 인터넷 사용윤리를 숙지할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UCC, 의미 없이 단순한 음란영상을 담은 UCC 등은 모두 이러한 기본적인 인터넷 세계의 룰을 숙지하지 못해서 나온 결과다. 다성음악이 각 성부가 명료하게 식별할 수 있는 선율적 독립성을 지니며 화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대위법이라는 규칙에 다라 음원이 결합되고,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UCC의 세계에도 대위법과 같은 인터넷 윤리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UCC라는 오선지 안에 실린 多音이 소음이 될 것이냐, 화음이 될 것이냐는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 있다.

                                                 2007.06 written by 따사

p.s 미디어 교육 추천 사이트
 

-미디어연대  

퍼블릭액세스 등 시민미디어운동단체, 미디어교육, 대안미디어운동 자료 수록.

http://www.access.or.kr/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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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라는 책에서 '무용지식(obsoledge)'을 언급하고 있다. 지식이 무용지식으로 변하는 속도도 갈수록 빨라져 끊임없이 업데이트를 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무용지식에 가두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식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는 정보지식시대의 인재는 완료형인재가 아니라 진행형 인재다. 쏟아지는 새로운 지식들을 습득하고 그 지식들이 쓸모없어지기 전에 새로운 지식을 업데이트하기위해 인재들은 폭넓은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유연하게 사고해야한다.


대한민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 시스템이 진행형인재가 아닌 완료형 인재를 양성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홍세화씨의 지적대로 한국인 들은 입시 때와 취업 때 만 바짝 긴장해 공부를 하고, 그 이후에 새로운 지식을 업데이트 하는 데는 무관심하다. 생애 초기에만 과열되는 교육열과 다양한 교양을 쌓을 수 없는 커리큘럼은 진행형 인재를 자라나게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이 정보화시대에 걸맞은 진행형인재를 양성하기위해 우선 대학교육 부터 바뀌어야한다. 지식기반 사회에서 대학은 더 이상 완성교육기관이 아니다. 미국의 국무부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대학 때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인이 되었고, 세계적인 디자이너 프라다의 학부 전공은 정치학이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라도 학부시절 쌓은 풍부한 교양은 유연한 사고를 하는 개성적인 전문가를 키울 수 있다. 대학은 이러한 개성적인 전문가를 키울 수 있도록 전공과 관련 없더라도 다양한 교양과목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진행형 인재는 전 생애를 걸친 계속 학습을 통해 그 능력을 유지하고 향상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 인재를 확보하기위해 대학으로 끝내는 양성체제가 아니라 계속 학습을 촉진하는 평생학습체제가 수립되어야한다. 우리나라 교육은 생애초기학습에만 너무 집중되어 있고, 생애초기 학습한 지식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는 데는 무심하다. 국제적 수준에 비추어본 한국 성인들의 교육 활동 참여율, 독서량, 문화 생활지표는 형편없다. 진행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미국, 영국, 핀란드 등의 선진국처럼 생애초기 학교 중심 양성체제에서 무게 중심을 성인 인적 자원의 평생학습지원체제로 이동시켜야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에 거는 기대치가 너무 높았다. 대학은 완성교육기관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 진행형인재로서 교양과 소양을 쌓아주는 곳이다.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은 평생학습을 통해 학습할 때 무용지식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지식을 업데이트 할 수 있다. 



                                               

                                             

                                                       2008.1 written by 따사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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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날이 있다.

그냥 무조건 나에게 위안을 주고 싶은 날. 그런 날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내가 할 일들에 유예해 준다. 그리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스스로에게 감당해내기 어려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날이다.

 오늘이 그랬다. 아침부터 눈을 뜨고 싶지가 않았다. 억지로 뒤늦게 도서관을 찾았지만 책을 읽고 싶진 않았다. 처음엔 신발을 살 목적으로 나갔지만 어느새 신발은 핑계가 되고, 정처 없이 헤매다 집으로 왔다. 두 시간 동안 점심을 먹는다는 이유로 집에서 빈둥거렸는데 생각해 보니 나는 오늘 점심을 먹지 않았다. 그냥 오늘따라 내가 지금 꼭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나는 오늘 만큼은 나에게 위안을 주고 싶었다. 오늘 만큼은 꼭 해야 할 일들을 할 필요 없이 그냥 좀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쉬고 있으라고...


 그런 날이 있다.

먹고 싶은 것은 없지만 군것질이 유난히 많은 날.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아무라도 꼭 만나야하는 날. 갈 곳은 없지만 그냥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니고 싶은 날. 우리가 제때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 것들을 제때 하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하다. 읽고 싶은 책이 없어도 도서관에 왔으니까 책을 읽어야 하는 것, 맘에 드는 물건이 없는데도 꼭 오늘 쇼핑을 해야 하는 것, 입맛이 없는데도 세끼를 챙겨 먹어야 하는 것.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들이 가끔씩 부담스럽고 어색할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런 날만큼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라도 내가 할 일들을 유예해 주어야한다. 이것은 스스로가 감당하기 버거운 삶의 무게를 이기는 최소한의 자기 위안이기 때문이다.

쉬운 듯 보이나 겪어 보면 너무 힘겨운 삶을 버티기 위해 적당한 마스터베이션은 필요하다.


                                                                 자기위안이 필요한 그런 날 written by 따사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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