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영감, 약속, 만남, 여행... 고래의뇌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97)
시나몬 주머니 (108)
가로질러 사유하기 (88)
Total
Today
Yesterday
1.
국순[누룩술]의 자는 자후(子厚, 흐뭇한 것)이다. 국순의 조상은 중국 진한시대 농서 사람으로 90대 할아버지 모(牟: 밀)가 순(舜) 임금 때 농사의 일을 맡았던 후직이란 사람을 도와서 만백성을 먹여 살린 공로가 있었다.
- 국순전 (임춘, 2003, 신원)

2.
일찍이 순(醇)이 섭법사에게 나가서 종일토록 담론한 일이 있었다. 이때 온 좌중의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허리를 잡았다. 이로부터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3.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국처사(麴處士)라고 불렀다. 이리하여 위로는 공경대부와 신선, 방사로부터 심지어는 남의 집 머슴, 나무꾼, 오랑캐나 외국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향긋한 이름을 마시는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흠모하였다.

4.
이들이 여럿이 많이 모였다가도, 만일 국처사가 오지 않으면 하나같이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국처사가 없으면 자리가 흥겹지 못하다." p.16



# # #


최초의 가전체 작품이라는 의의를 지니는 국순전. 가전체 작품 중에서도 으뜸이다. 국순전이 다른 작품과 차별성을 보이는 것은 국순과 상황을 묘사하는 재치에 있다. 임춘의 후속작인 공방전이나 여타 죽부인전, 정시자건은 친절하게도 주인공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의 행적을 나열한다. 분량이 불과 5~6 페이지에 불과한 당시 사정을 고려하면 명쾌한 전개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겨우 대상의 역사와 외관을 설명하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 반면에 국순전은 그러한 장치가 매우 적다. 대신 국순이 관계하는 상황과 주변인의 입을 빌어 국순의 색과 향기, 그리고 성격까지 그려내고 있다. 약 800년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빛을 바래지 않고 있다.
Posted by 고래의뇌
, |

겨울비, 심금, 빛의 제국, 피레네의 성... 르네 마그리트는 초현실적인 작품만큼이나 시적인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시적인 제목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하지 않고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마법에 빠져들게 한다"라고 말하며 시적인 제목을 작품의 주요 요소로 중시했다.

난 만화책 <블리치(Bleach, Tite Kubo, 2004~)>를 마그리트와 같은 이유로 좋아한다. <블리치>의 매 챕터 표지에서는 마그리트가 말한 시적 언어를 자주 만날 수 있다. 싸우는 장소, 목적, 상대에 따라 다채로운 언어들로 수놓고 있는 챕터 표지. 타이토 쿠보는 챕터 표지를 때로는 흩뿌리는 시처럼, 때로는 질주하는 영화처럼 온갖 공력을 기울인다.  
 
1.
이치고와 친구들이 학교를 다니는 블리치 챕터 표지들은 살랑거리듯 가볍고 경쾌하다. 모든 싸움은 고만고만한 방학 숙제나, 모두가 기다리는 수업종료 종처럼.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루키아를 잃은 뒤 거듭된 훈련 속에 검의 자아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내면의 깊이만큼 챕터 표지도 점차 본연의 색과 과감한 구도를 활용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세계에 적합한 언어와 구도, 저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빛, 불확실한 한 걸음 한 걸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수 많은 싸움, 수 많은 입장... 이야기는 점점 깊어지고, 얽혀있는 감정들의 실타래가 갈래갈래 복잡해질수록, 신기하게도 표현은 더 단순해진다. 때로는 기쁨을, 때로는 슬픔을, 그 사이마다 분노와 공포까지 거리낌없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4.
최근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블리치는 챕터 -108 ~ -97을 통해 주변부 캐릭터를 단숨에 이야기의 중심부로 가져온다. 'Turn Back The Pendulum'이란 시적 제목 외에 챕터 숫자 앞에 '-'를 붙여 챕터 자체를 이전 챕터와 동등한 별도의 위치를 부여한 점은 정말이지 탁월하다. 이 챕터를 통해 <블리치>는 몇 개의 별을 위한 이야기에서, 수십개 각자의 빛을 노래하는 별들의 이야기로 탈바꿈된다.

Chapter -108. Turn Back The Pendulum (역시 One Manga)
http://www.onemanga.com/Bleach/315.01/0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만화의 챕터 표지는 소설, 시, 영화 등과 만화를 차별화시켜주는 중요한 형식적 요소다. 챕터 표지는 길고 긴 한편의 이야기를 수 백개의 짧은 호흡으로 나눠준다. 각 호흡은 전체 이야기 하위로 기능하는 동시에 각각의 선명한 색과 향을 간직한다. 이는 아마도 일/주간으로 소개되는 만화 출간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그 오랜 전통 덕분에 만화는 특정 소재에 대해 입체적이고 속도감있게 다양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타이토 쿠보의 챕터 표지는 수많은 만화 중에서도 특별하다할 수 있다. 영화 브로셔처럼, 책갈피 속의 시처럼, <블리치> 챕터 표지들도 기억되고 회자될 가치가 있다.

Posted by 고래의뇌
, |
내가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그녀가 말했다.  p.40

- 오자히르 (OZahir, Paulo Coelho, 2005, 문학동네)

내가 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한,
어제 같은 상황은 또다시 되풀이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불행해질 테고,
결국엔 그녀 쪽에서 나를 떠나게 될 거라고 했다.  p.40

나의 자히르, 그것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에스테르라는.  p.78


성당, 그것은 나였다. 우리들 각자였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모습도 변화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벽이나 문 또는 창문이 아닌, 그 안에 존재하는 빈 공간을 위해서다.
내부의 빈 공간, 그곳에서 우리는 가장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들을 숭배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
그러나 내 성당 안의 빈 공간에는 무엇이 있는가?  p.89


"나는 기차 선로가 왜 143.5 센티미터 혹은 4피트 8과 2분의 1인치 떨어져 있는지를 알아내겠어요."  p.174

문제는 만사가 너무 익숙해지는 지점,
사랑이 적극적인 문제나 대결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그저 단순한 해결책이 되고 마는 지점을 향해 우리가 나아가고 있다는 거야.  p.210


'스텝의 전통인 텡그리에 따르면,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 있어야 하오.'  p.275


문을 닫아라. 다른 음악을 틀어라.
지금까지의 너이기를 그만두라. 그리고 너 자신이 돼라.  p.287

자히르, 그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 내려온 모든 것 위에 고착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질문도 답변없이 놓아두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만물의 변화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p.353




코엘료는 묻는다.
"그대의 사랑은 이미 완성되었는가?", "온전한 사랑이란 가능한가?"

코엘료의 자전적 소설 <오자히르>는 안정된 궤도에 오른 '완성된 사랑'에 대해 다신 한번 마주할 것을 주문한다. 만약 그 사랑이 수많은 원칙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고, 바람이 드나들 수 있는 빈 공간이 없으며, 익숙한 어제와 단순한 타협만이 되풀이 되고 있다면... 다시 한번 힘껏 움직여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새로운 노래에 맞춰 다시 한번 사랑이 마음껏 춤출 수 있도록.

<오자히르>가 정녕 코엘료의 자전적 소설이라면, 그는 멋진 배우자를 만났음이 분명하다. 남자들은 남편이 되는 순간 경직된다. 결혼이란 한 여자와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속한 사회와 모종의 계약관계로 급전환되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양치기 청년의 피라미드는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다. 보통.  

코엘료는 뜻모를 아내의 떠남을 통해 순례자의 길을 걷게 된다. 자의건 타의건, 한 가정의 가장이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길위에서 코엘료는 자신의 잃어버린 피라미드를 발견한다. 그리고 오랜시간 미뤄왔던 글쓰기를 시작한다.

코엘료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에스테르가 떠나기 전에, "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고래의뇌
, |

지난 12월 17일, 국내에 '히말라야 도선관'이란 책으로 소개된 존 우드의 '룸 투 리드(Room to Read)'가 글로벌 PR회사 케첨(Ketchum)의 전략적인 파트너로 선정됐다. 케첨은 개도국의 빈곤의 사슬을 끊기 위해 전세계적인 문맹률을 낮추겠다는 룸 투 리드의 비전에 장기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번 파트너십은 케첨 임직원들의 지지에 따른 'nonprofit client-of-choice'의 형태로 진행됐으며, 명료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향후 전세계 지사 및 임직원들이 프로보노 형태로 '룸 투 리드' 사업을 지원하게 된다.

이를 위해 케첨은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운동이 확산될 수 있도록 전략적인 커뮤니케이션 컨설팅을 제공할 계획이다. 또한 직원들의 자발적인 '룸 투 리드' 기부를 통해 재정적인 지원까지 병행할 예정이다.

케첨은 '룸 투 리드'와의 장기적 파트너십 체결을 통해 'Global Literacy'라는 공통 분모를 강화했다. 수 많은 공중과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글로벌 PR회사로써, CSR에 대한 책임감을 확보하는 동시에 PR 업의 정체성을 멋지게 조합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아주 짧은 뉴스였지만, 커뮤니케이션과 사회적기업에 관심 많은 나로써는 이 둘의 협업이 어떤 시너지를 가져올 것인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전문: Room to Read and Ketchum Join Forces to Support Worldwide Literacy)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고래의뇌
, |
" 저는 오히려 모든 가르침과 모든 스승들을 떠나기 위해서,
  그리하여 오로지 나 혼자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렇지 못하면 죽으려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훗날 저는 자주 이날을 생각할 것입니다. " p.50

- 싯다르타 (Siddhartha, 헤르만 헤세, 2004, 문예출판사)

당신께서는 죽음에서 해탈하는 방법을 터득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독자적인 구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명상을 통하여, 참선을 통하여, 인식을 통하여, 각성을 통하여, 당신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걷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설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p.50


... 그는 이러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디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기듯이 이러한 감정의 바닥에까지, 원인(原因)이 쉬고 있는 밑바닥까지 빠져들어갔다. 원인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곧 사고(思考)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고를 통해서만 감정은 인식으로 화하며, 소멸되지 않을 뿐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 되어 감정 속에 내재한 것을 발산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p.54

그것은 자아(自我)였다. 그 의미와 본질을 나는 알고자 했다. 그곳에서 내가 빠져나오려고 했던 것, 극복하고자 했던 것, 그것은 자아였따.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극복할 수는 없었고 다만 기만할 수 있었을 뿐이다. 다만 그것에서 도망쳐서 그 앞에서 숨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실로 세상에서 이 자아만큼 내가 생각에 몰두하게 만든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다는 이 수수께끼... p.55


당신은 나와 같소. 당신은 대부분의 인간들과 다르오. 당신은 카마라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오. 당신의 마음 속에는 언제라도 그 속에 들어가 당신 자신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조용한 안식처가 있소. 그 점은 나 역시 마찬가지지요. 그런 사람은 별로 많지 않소.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말이오. p.95

... 카마라여, 대부분의 인간들은 바람에 날려 빙글 돌다가 방향을 잃고 땅바닥에 굴러떨어지는 낙엽과 같은 존재요. 하지만 드물게도 별(星)처럼 확고한 자기의 궤도를 가는 사람이 있소. 그들은 바람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내부에 그들 나름대로의 법칙과 궤도를 가지고 있소. p.95


그들은 끝이 없는 끝이 없는 유희를 하던 게 아닌가? 유희를 위하여 산다는 게 필요한 일일까? 아니다, 그것은 필요한 일이 아니다! 이 유희야 말로 윤회(輪廻)다. 어린아이들의 놀음, 아마도 한 번, 두 번, 열 번은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놀음이다 - 하지만 끊임없이 거듭 되풀이 된다면? p.108


그런데 오늘은 새롭게 들렸다. 어느덧 그는 숱한 음성들을 구별하여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우는 소리에서 기쁜 소리를, 어른의 소리에서 아이의 소리를 구별하여 들을 수가 없었다. 모든 소리는 한데 얽혀 있었다. 동경의 탄식과 지자의 웃음소리, 분노의 외침과 죽어가는 자의 신음소리,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고 모든 것이 뒤섞여 짜이고 맺어져 천 번 만 번 뒤얽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묶여서, 모든 소리, 모든 목표, 모든 갈망, 모든 번뇌, 모든 쾌락, 모든 선과 모든 악, 이 모든 것이 합쳐서 세상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서 생성의 강이요, 삶의 음악이었다... 그 말은 완성의 뜻 "옴"이었다. p.171


독자적인 구도, 사고, 자아, 조용한 안식처, 자기의 궤도...

<싯다르타> 책 곳곳에 퍼즐 조각이 숨겨져 있다. 그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가다 보면 만나게 된다. 우리가 원칙이라고 믿고 따라온 수많은 가르침들 사이에 두고 온, 결코 이해할 수 없었고, 결코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우리 자신들의 그 무언가를.

각각의 퍼즐 조각에 자신만의 답을 대입할 수 있다면 다시 자기의 궤도에 오를 수 있을 거다. 조용한 안식처와 함께.

모처럼 깊은 울림을 안겨주는 고전을 만났다.
메리 크리스마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고래의뇌
, |
오른쪽이와 내가 협력해온 싸움...
그건 아무래도 지구를 위한 싸움 같은건 아니었다.
인간을 위한... 아니, 나라는 개인을 위한 싸움이었다.
오른쪽이는 둘째치고 나는 끝내 기생생물의 입장에 설 수 없었다.
그렇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생물들은 때로는 서로를 이용하고, 때로는 죽인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아니, 상대를 자신이라는 '종'의 잣대로 재면서
다 파악한 기분을 내서는 안 된다.
다른 생물의 마음을 아는 체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다른 생물들은 아무것도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설령 전혀 이해할 수 없어도 존중해야할 동거인에는 틀림없다.

다른 생물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외롭기 때문이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멸망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마음에는 인간 개인의 만족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그게 전부니까.
인간의 잣대로 인간 자신을 비하해 봤자 의미는 없다.

- 신이치 (Shinichi Izumi, 기생수 #10)

(오른쪽 -> 왼쪽 읽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느 날 길에서...
길에서 만나 알게된 생물이 문득 돌아보니 죽어 있었다.
그럴 때면 왜 슬퍼지는 걸까.

그야 인간이 그렇게 한가한 동물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최대의 강점이라구.
마음에 여유가 있는 생물. 이 얼마나 멋진 일이야!!

- 오른쪽이 (Migi, 기생수 #10)


이야기 내용만이 아니라 만화의 구성법이 전혀 달랐다. 무슨 소리냐 하면, <후코>는 우선 작품 속에 <등장인물>이 있고 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사건>을 생각해 가는 식이었다. 그에 반해 <기생수>는 우선 <사건>이 존재하고 이어서 그에 대처할 <등장인물>들을 배치해 갔다는 얘기다. 전자의 <등장인물>에 맞춰 <사건>들을 만들어갈 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데다 통 진도가 나가지 않았는데, <사건>을 먼저 만드는 것은 그 자체가 즐겁고, 펜끝도 슬슬 움직였다. 나는 그런 타입의 만화가였던 것이다. 그걸 깨달았을 때 기생수라는 소재를 서랍에서 끌어냈던 것이다.

- 이와아키 히토시 (Hitoshi Iwaaki, 1995)


기생수를 거의 10년만에 다시 읽었다. 전에 없던 깊이와 구성을 재발견하는 기쁨은 네 차례 읽었던 헤르만 헤서의 <데미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Hitoshi Iwaaki는 외계인의 시각을 빌어 겨우 10권의 만화책에서 인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 이기심, 약함(Fragile), 강점(여유)... 집단지성까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현재 기생수(Parasyte)는 북미에서 출간되고 있으며, 영화로도 제작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Hitoshi Iwaaki는 현재 대작 히스토리에(Historie)를 집필 중이다.


* 기생수(Parasyte) 관련 정보
http://en.wikipedia.org/wiki/Parasyte

** 기생수(Parasyte) 영문판 (정말 대단한 사이트다)
http://www.onemanga.com/Parasyte/
Posted by 고래의뇌
, |
산은 내게 심호흡을 가르친다. '두 계단에 한번'. '정상까지 세번'... 중간에서 한번 정도 쉬고 나면 체력과 컨디션은 최악으로 치닫고. 그전까지는 호흡이 몸을 못 따라 왔다면, 이후부터는 호흡이 몸을 이끌기 시작한다.

근심의 개수만큼 계단을 오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가득 안고 오르는 산.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호흡을 펌프질하며 온갖 주문을 외워도 좀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단계에 이르면, 세상의 온갖 고뇌는 모두 땀방울처럼 떨어져나가고 머리는 멍해지며 결국 개운하게 증발한다.

그렇게 단순한, 하지만 무엇보다 격렬한 내쉬기와 들이마시기를 반복하다보면 그 단순한 진리 속에 엉망진창 뒤죽박죽이었던 인생도 다시 한번 시작해 볼만한 간단한 무대가 되어버린다. 나는 이 맛에 산을 찾고, 산은 늘 기꺼이 이를 선물한다.

*
도봉산은 서울에서 가장 즐겨찾는 산. 도봉산은 정상에서 약 절반 가량이 돌로 된 산이다. 그래서 도봉산을 남자 산이라고도 한다. 내가 도봉산의 암석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뛰어내려올 때의 리듬감 때문이다. 큰 돌, 작은 돌 사이를 풀쩍풀쩍 뛰어넘으면 마치 두 다리를 스틱으로 산의 돌 드럼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난다. '탁타다 탁 타다다다 탁탁' 그 연주가 좋아 또 도봉산을 찾는다.


- 2008.9.13.토 -

Posted by 고래의뇌
, |
신혼여행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그라나다에 다녀왔다.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천재적인 선배들의 유산과 이를 한층 성숙한 모습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스페인 사람들의 노력과 활기. 사실 과거의 유산이 찬란하게 빛날 수록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그림자에 묻히는 경우가 많은데, 스페인은 그 점에서 남달랐다.


첫 번째.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Temlpe de La Sagrada Familia, Barcelona)

건축도시 바르셀로나 곳곳에 기괴하고 파격적인 영감을 불어 넣은 천재 건축가 가우디(Gaudi)의 미완성 대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만큼 안팎의 모습이 다르고 계속 진화하는 유적이 또 있을까?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며 차곡차곡 웅변하는 듯한 환상적인 외벽을 지나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누구나 당황스러움과 환희 한 가운데에 놓이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나 역시 처음에는 무엇하나 제 모습을 갖지 않는 미완성의 내부구조에 실망했다. 하지만 한 바퀴를 돌 때쯤, 관광객 속에서 가우디의 숙제를 머리를 맞대며 해석하며 한조각한조각 쌓아올려가는 건축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활기는 성당을 안쪽부터 빛내고 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1882년에 착공되어 지금도 건축 중이다. 성당은 가우디라는 천재 건축가의 상상력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을 포함한 전세계 건축가, 예술가, 시민들의 힘을 모아 더 크노 원대한 이상향을 향해 진화하고 있다. 세계는 가우디 프로젝트의 한걸음 한걸음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응원하고 있다.

건축자금은 순전히 자발적 후원금과 관광수입으로 조달되고 있다. 후원으로 만들어져서인지 가우디 말년 모습 때문인지 '빈자들의 성당(Cathedral of the Poor)'으로도 불리는 파밀리아 성당은 2026년(가우디 사망 100주년) 완공될 예정이다. 10년 후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있을지 궁금하다. (
http://en.wikipedia.org/wiki/Sagrada_Fam%C3%ADlia)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 번째. 작가 미상의 그라나다 담벼락 그라피티
(Alhambra, Granada) 

일전에 한 일본인의 작품을 통해 덧칠되고 덧칠되는 그라피티의 덧없음을 안타까워한 적이 있다. 하지만 카톨릭과 이슬람이 서로를 덧칠하며 이슬람 미술의 정점을 오늘날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는 이곳 그라나다는 알람브라 궁전의 타일 문양처럼 눈부신 그라피티 문화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전에 먼저 스페인에 가면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에 들릴 것을 강추한다. 나는 건축적인 요소보다는 궁전 내부의 천장, 벽, 바닥을 가득 메운 타일 문양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인도 타지마할과는 또 다른 격렬함과 세련됨의 극치가 코란 정신세계를 구현하고 있었다. (다만 1박 2일 이상은 권하고 싶지 않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알람브라 궁전을 나와 길을 따라 걸으면 초등학교, 시설 담벼락은 물론 건물 전면에까지 담쟁이 덩굴처럼 타고 오르는 다채로운 그라피티들을 만나게 된다. 음악가, 어머니, 외계인, 다양한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아이들의 꿈과 희망, 상상력을 자극하는 등하교길의 그라피티는 그림들은 물론 저녁노을처럼 따스하게 감싸는 색감까지도 일품이었다. 과거의 유산과 현재의 응원들이 한데 모여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느낌이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각해보면 우리도 선배들로부터 많은 유산을 선물받았다.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60년 전 선배들은 나라를 되찾고, 30년 전 두 발로 자립할 수 있는 경제규모와 자율성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기러기 아빠로 대변되는 우리 부모세대 역시 우리가 마음껏 날아오를 수 있는 지적, 경제적 활주로를 닦아주었다.

가우디와 같은 인물이 나와야 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에 정신을 가두지 않고 자연에서, 우주, 신에 이르기까지 한번 신나게 놀아보는 거다.
Posted by 고래의뇌
, |

1982년.
아쇼카재단은 모두 5명의 아쇼카 펠로우를 선정한다. 그들은 모두 인도인이었다.
이들 중 4명이 점점 불모지가 되어 가는 인도에 주목했다.

인도 환경운동의 아버지,
Anil Agarwal
벌목과 방목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부족의 경제기반을 재구축한,
 H. Sudarshan과 Aditya Patnaik
고향을 잃고 떠돌아야하는 부족들에게 인권과 법적 절차를 가르친,
Vasudha Vasanti Dhagamwar

모두의 사업이 주목할 가치가 있지만 그 중 Anil Agarwal의 행보와 사업은 특히 하나하나 곱씹어 볼 가치가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Anil Agarwal은 전직 저널리스트였다. 저널리스트로 인도 전역의 개발 현장을 취재하던 중 나무의 벌목저항하는 여인들의 운동에서 환경의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게 된다.

Anil Agarwal은 환경과 개발이 양립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인도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고, 인구 증가 속도만큼 식량증대가 필요했다. 과거에 비해 2~3배 많은 작물을 수확하면서 땅은 점점 메말라 갔다. 델리를 흐르는 야무나(Yamuna) 강에서만 가정에서 매일 2억 리터, 공장과 도심에서 2천만 리터의 물이 사라져갔다. 여기에 통제불가능한 방목, 재배, 벌목으로 인해 약 1억 5천 헥타르의 토지가 불모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1980년, Anil Agarwal은 과학과 환경을 위한 센터(Center for Science and Environment)를 세우고 연구, 조사를 통해 광범위한 칼럼 작업을 시작했다. 과거의 정부 보조금 및 보조활동들의 비효율성을 지적하고 좀더 현실적인 조치들이 채택될 수 있는 활동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CSE 환경보고서는 인도보다 먼저 국제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각국에 소개되었다.

보고서는 차츰 인도 환경정책결정자들의 주요 참고자료로 채택되었다. 인도 환경 아젠다 선정에 논리적인 근거를 제공하며 Anil Agarwal은 의회 및 각료회의에서 환경 보고서를 발표해 왔다. 연구보고서는 인도 전역에 출간되어 배급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ttp://www.cseindia.org/

CSE는 연구보고서 외에도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첫 번째 사업영역은 연구조사 및 출판. CSE는 격주로 'Down to Earth'라는 과학-환경 전문지를 발간한다. 70페이지에 달하는 'Down to Earth'는 인도 외에 스리랑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몰디브, 부탄 등 남아시아를 포함한 취재와 조사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밖에도 어린이들을 위한 gobar times을 발간하고 있다. (Publication)


사용자 삽입 이미지
http://magazine.downtoearth.org.in/

두 번째 사업영역은 교육훈련. CSE는 방대하고 체계적인 자료를 기반으로 학교, 학생, 선생님을 대상으로 눈높이에 맞춘 환경교육을 진행한다. (Training programmes) 동시에 미디어 리소스 개발 및 제공하고 있다. CSE는 탄탄한 연구조사자료를 미디어가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재가공한다(Media Resource Centre). 필요에 따라 사진 및 동영상도 확보해 놓고 있으며, 미디어 대상으로 과학-환경 전문 지식을 교육시키기도 한다. (Media Fellowship)

마지막은 대국민 캠페인. CSE 활동의 정점은 대국민 캠페인 활동. CSE는 정부와 미디어에 전문자료를 제공하는 한편 인도 국민들이 일상생활을 통해 환경사업을 실천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대표적인 캠페인으로 세계적인 공해 도시인 델리의 공기를 정화시키기 위한 'Right To Clean Air campaign'과 빗물 이용을 장려하는 'People's Water Management campaign' 등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ttp://www.rainwaterharvesting.org/

 



사회적기업을 들여다 볼 수록 점점 인도라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 근저의 에너지가 궁금해 진다.인도에서 이렇게 수많은 사회적 기업가들이 자생적으로 태어난 배경은 무엇일까?

Ashoka Fellow 1982
http://www.ashoka.org/search/fellows?year=1982&

Posted by 고래의뇌
, |
최초의 아쇼카 펠로우는 1969년, 인도의 Minal Kavishwar.

Minal Kavishwar는 정신적 질병, 스트레스, 육체적 장애 등 건강 이슈에 주목해, 현대 인도에서 만연하고 있는 자폐증(autism), 우울증(depression), 고혈압(high-blood pressure) 등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동물' 친구들이 강력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병원, 요양시설, 상담소 등에서 동물 매개 치료(animal-assisted therapy)에 대한 국제 표준을 도입하고 차츰 인도 국내법을 변화시켜 나갔다. 잘 훈련된 치료견, 내과 의사, 연구원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도움이 필요한 인도의 공동체들에게 동물 매개 치료를 제공했다.

2002년, Minal Kavishwar는 'Animal Angels'를 설립하면서 'Humanimality'이란 개념을 통해 동물 치료를 한 단계 발전시킨다. 그녀에 따르면, 'Humanity'란 오직 인간을 위해 만든 개념으로 사랑, 보살핌, 친절, 연민 등을 의인화한 결정체다. 하지만 수세기에 걸쳐 인간과 좋은 친구로 지내온 동물은 사랑, 보살핌을 보여주고 나아가 인간을 치료하기도 했다. 때문에 만약 'Humanity'가 인간 이외의 다른 종에게까지 확산될 수 있다면 그것은 '동물'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그녀는 동물 매개 치료가 인도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의학적, 법적, 학문적 제반 환경을 재정비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 Animal Angels 홈페이지
http://www.animalangels.org.in/aa/aboutus.htm#volunteers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969년 아쇼카 펠로우는 인도 Minal Kavishwar, 파키스탄 Aamir Sohail Saddozai가 선정됨(총 2명). 둘 다 정신적 물리적 건강 이슈에 주목.
http://www.ashoka.org/search/fellows?year=1969&
Posted by 고래의뇌
, |